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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샤넬] 외롭던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프랑스의 천재 패션 디자이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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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6-09-20 오전 10:05:42 |
이메일 | unit324@suwonmental.org | 조회수 | 39 |
가브리엘 샤넬의 심미안
- 외롭던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프랑스의 천재 패션 디자이너
두 개의 C가 겹쳐있는 샤넬 로고가 박힌 가방과 트위드 재킷은 전세계 여성들의 로망입니다.
‘코코 샤넬’이란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 가브리엘 샤넬은 옷으로 여성에게 자유를 선사한 패션 혁명가입니다.
그녀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재킷을 최초로 여성복에 도입했습니다.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 등 시그니처 아이템들은 여성의 사회 진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패션으로 세상을 바꾼 여자, 가브리엘 샤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Fashion fades, style remains the same" - Gabrielle Chanel (1883~1971)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 가브리엘 샤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실과 바늘을 놓지 않았던 그녀
샤넬은 세상을 떠난지 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브랜드 ‘샤넬’을 창시한 그녀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지독하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데다 어머니마저 샤넬이 12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샤넬은 여동생과 고아원에 맡겨졌고 그 여동생은 고아원에서 숨졌습니다
어린 샤넬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샤넬은 고아원에서 친구도 사귀지 않았고
언제나 말없이 혼자 지냈습니다. 샤넬은 자존심이 강한 데다가 쌀쌀맞아서 친구가 없었다고 합니다.
샤넬은 성공을 갈망했습니다
물랭의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벌었지만 언젠가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녀의 패션 철학은 간단했습니다. 실용적이고 편안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코르셋으로 허리를 졸라매고 화려한 장식과 값비싼 드레스를 강조한 유행을 샤넬은 증오했습니다.
그래서 코르셋을 없앴으며, 바닥에 끌리던 드레스 길이를 무릎까지 올렸고 남성 정장에서 볼 법한 직선의 실루엣을 선보였습니다.
그녀의 혁신은 1920년대 여권 신장 운동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샤넬은 MGM 창립자인 할리우드의 거물 새뮤얼 골드윈의 제의를 받아들여 1백만 달러를 받고 골드윈 휘하 배우들의 의상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죠. 1935년 결혼설까지 나돌게 된 동갑내기 연인 폴 이리브가 테니스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샤넬은 참담한 마음 가운데서도 더욱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직원들이 파업을 벌이면서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같은 시기에 다른 패션 디자이너들이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히틀러가 일으킨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1939년에 결국 사업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고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그녀의 놀라운 ‘심미안’에 있었습니다
가브리엘 샤넬은 한가로운 해변에서 여가 활동에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받아 이른바 도빌룩(프랑스 북부 해안에서 착용되는 리조트 웨어 혹은 그런 풍의 스타일)을 선보였습니다.
또, 사람들은 검은색 옷은 장례식장에서나 입는 옷이라고 생각했지만, 샤넬은 매우 특별한 색이라고 생각해 검은색 드레스를 만들었고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샤넬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녀는 스케치를 하지 않고 옷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디자인 중인 의상을 모델에게 입혀보고 또 입혀보는 방식으로 옷을 완성했습니다.
당시 샤넬이 만든 정장은 혁명이었으며 가방, 악세사리는 독창적인 것이었습니다.
간단하고 입기 편하며 활동적이지만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스타일은 지금 시대의 빠른 유행의 변천속도에도 변함없이 여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