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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 비판과 암투병, 끊임없는 나치의 추적 등 숱한 고난을 이겨낸 정신분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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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6-09-26 오후 3:35:26 |
이메일 | unit324@suwonmental.org | 조회수 | 32 |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판단력
동료들의 비판과 암투병, 끊임없는 나치의 추적 등
숱한 고난을 냉철한 판단력과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며 정신분석학의 대가가 되다.
“곧 태어날 아이가 왕자라면, 이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끌 것이다.” 또는 “OO군이 세자로 책봉되어야 나라가 평온해진다.”
역사극을 보다보면 위와 같은 예언들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여기 또, 태어나자마자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예언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이자 정신병리학자이며, 정신분석의 창시자이기도 한 사람!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입니다.
크림 전쟁이 끝나던 해인 1856년 5월 6일,
지금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된 오스트리아의 프라이베르크 모라비아라는 작은 마을의 유대인 부부 사이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태어날 당시, 옆을 지나가던 노파 한 명이 아이의 어머니에게 다가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아이가 크면 온 세상을 뒤흔들 정도로 위대한 업적을 남길 것입니다.”
노파의 말 때문일까요?
가족들은 이 아이에게 엄청난 기대와 함께 사랑과 관심을 퍼붓습니다.
온 가족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성장해서인지, 이 아이는 다소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성장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해결해내고 싶은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집착하며 그것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집념 덕분에 이 아이는 당시 사회에 만연돼 있던 유태인 차별과 박해를 극복하고, 20세기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정신 분석을 창시하게 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이하 프로이트)가 네 살 되던 해에, 프로이트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비엔나로 이주합니다.
이곳에서 프로이트 가족은 좁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촛불로 불을 밝히는 등 힘겨운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프로이트만큼은 늘 독방을 사용하고, 기름등잔을 켜며 비교적 여유로운 환경에서 생활합니다.
이는 프로이트가 유독 총명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어날 적에 그를 두고 ‘장차 위대한 업적을 남길 아이’라고 한 노파의 말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족들의 관심과 기대, 지지를 받으며 학업을 이어가던 프로이트에게 1885년에 비로소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옵니다.
프로이트의 생리학 스승인 브뤼케의 추천 덕분에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된 것입니다.
파리로 유학을 떠난 프로이트는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신경의학자인 쟝 샤르코에게 수업을 듣고,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체류하며 신경학자에서 정신 병리학자로 전환하는 등의 왕성한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험들을 토대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창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이후에는 비엔나의 유명한 외과 의사인 요셉 브로이어와 공동으로 연구를 하며 깊은 우정을 나눕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공동으로 집필한 <히스테리 연구>가 다른 학자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게 되자 둘 사이도 멀어집니다.
비판에 큰 충격을 받은 브로이어가 자신의 주장에 회의감을 느낄 때 즈음 프로이트가 히스테리의 주된 원인이 ‘성욕’이라고 주장을 하면서 의사들의 비판까지 감내해야 하는 상황오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의 주장에 대한 다른 의사들의 계속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비엔나 의사회를 사퇴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고수합니다.
그리고 그 무렵 <히스테리 병인론>에서 ‘정신분석’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1890년과 1900년 사이는 프로이트에게 고독한 시기이자, 많은 업적을 남겨준 시기입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 이론의 기초를 닦으며 책을 집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들이 토대가 되어 프로이트의 가장 위대한 저서로 평가되는 <꿈의 해석>이 완성됩니다.
그러나 <꿈의 해석>이 출간될 당시에는 이 책에 대한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209달러의 원고료만 받고 600부를 발간한 것이 전부였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이 때문에 프로이트는 정신 병리학회로 부터 묵살되고, <꿈의 해석>의 내용을 토대로 개설된 강의 '꿈에 대하여'를 청강자 세 명만 두고 진행하게 되는 등 굴욕적인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로이트의 명상이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1902년에는 비엔나 정신 분석학회도 창립하게 되는데, 이 학회를 통해 융, 아들러, 오토 랭크와 같은 많은 정신 분석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프로이트가 더욱 유명해지게 된 것은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당시 매사추세츠 주 클라크 대학의 총장이었던 스탠리 홀이 프로이트와 융에게 강연을 부탁하면서 부터입니다.
이를 계기로 정신분석이 대중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게 됩니다.
나아가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정신분석을 의학 훈련의 중요한 과목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프로이트에게 찾아온 첫 번째 기회가 파리로 떠난 유학이라면, 두 번째 기회는 제1차 세계 대전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을 상대로 임상 연구를 실시했는데, 이 임상 연구 덕분에 정신병학의 다양성과 미묘함을 배우게 됩니다.
또, 전쟁으로 인해 반유태주의 사상이 고조되면서 인간의 사회적 특성을 비관적으로 보는 새로운 시야도 갖게 됩니다.
학구적으로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시기이지만, 정서적으로는 고난이 따르는 시기였습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집권하게 되면서 독일의 비밀경찰들이 유태인인 프로이트의 저서를 모두 불태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프로이트를 표적으로 삼다가,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에 침입하여 '국제 정신분석 출판소'를 몰수하고 압박을 가하기에 이릅니다.
다행히도 프로이트와 그의 가족들이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외교적 노력으로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지만, 그 때까지 끔찍한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영국으로 망명된 후에는 안정적인 생활로 돌아가기도 전에 후두암이 발견되어 생을 마감합니다.
프로이트는 태어나서 생을 마감 할 때까지, 동료들의 비판과 암투병, 끊임없는 나치의 추적 등 숱한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했기 때문입니다.